안녕하세요 오늘 이시간에는 유관순의 업적과 유관순의 본받을점을 함께 알아보기로 하겠습니다.

유관순의 출생지는 충청남도 천안이며 본관은 고흥이며 여성 동립운동가중 꽤 유명한 인물로 알려져 있습니다. 아버지는 중권이고 어머니는 이씨이며 5남매중 둘째 딸로 태어났습니다. 미국인 여성선교사의 도움으로 인해 1916년 기독교감리교 공주교구의 이화학당 교비생으로 입학하였으며, 1919년 3월 1일 3.1운동이 일어나게 되자 이화학당 고등과 1년생으로 이 시위에 참가하게 됩니다. 일본은 그것을 알고 나게 되어 이화학당을 휴교시키게 되고 고향으로 온 후 천신학교 및 교회를 찾아다니며 현재(그 당시)의 경성 독립 운동상황을 설명하고 이곳에서도 마찬가지로 시위를 진행할 것을 권유하게 되었습니다. 




조인원 , 김구응 등의 마을지도자들과 합동으로 청주,진천 등지쪽 교회와 유림계를 합쳐 음력 3월1일 만세시위를 아우내(충청남도 천안 병천)장터에서 진행할 것을 추진하였습니다. 이 시위가 진행됨에 따라 수천명의 군중과 함께 독립만세를 부르며 격렬한 독립만세를 진행하였는데 시위의 진행중 일본헌병의 총과 칼에 아버지와 어머니가 사망하게 되었으며 유관순 본인은 이 3.1운동 시위의 주동자로 잡히게 되어 일제의 모진 고문을 받게 되었으나 끝끝내 굴복하지 않았습니다. 



공주지방법원에서 3년형을 받게 되었으나 이에 항소하고 경성복심법원에서 다시 재판을 받았는데 그 과정에서 또 다시 독립만세를 부르며 일제의 한국침략을 비난, 항의하며 재판관들에게 일제법률에 의한 일본식 재판은 부당함을 알리다 법정모욕죄까지 추가로 붙게 되어 총 7년의 추가징역형을 받게 됩니다. 결국 서대문 형무소에서 옥살이를 하게 되었는데 옥살이를 하는 내내 수시로 독립만세를 외쳤으며 그럴때마다 형무관에게 끌려가서 모진 고문을 당하게 됩니다. 하지만 굳은 의지로 독림만세 제창을 계속 하다 1920년 17세의 꽃다운 나이에 형무소에서 옥사하게 됩니다. 



유관순이 사망한지 이틀이 지나서야 소식을 듣게 된 윌터선생과 교장 푸라이는 형무소 당국에 유관순의 시신을 인도요청하였으나 일제의 거부로 인해 시신을 받지 못했습니다. 유관순의 사망을 전 국제여론을 통해 호소하겠다고 통보하며 강력하게 항의하여 간신히 시신을 돌려받게 되었습니다. 하지만 시체를 인수하여 본 결과 유관순의 시체는 잔인하게 토막난 비참한 모습이었습니다. 세월이 지난 1962년 건국훈장 국민장이 추서됩니다. 



유관순 본받을점 과연 무엇일까요

간단하게 자신의 몸을 희생시키며 나라의 독립을 이루는데 일조했으며 그 애국심을 본받아야 한다고 알아두시면 좋을 것 같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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